생강빵과 진저브레드
🔖 친구라고 하기에는 서로에 대한 소유욕이 지나치게 강하고, 오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격정적이다. 어른들은 그들에게 친구나 연인, 오누이 중 한 가지만 선택해 그에 맞춰 살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들은 그 무엇도 되고 싶어하지 않으며, 동시에 그 모든 것이 되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에게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말한다.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나,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있어. 그가 나의 기쁨이라서가 아니야. 나 자신도 내게 늘 기쁨이 되어주지 못하는걸. 다만 그는 내 존재 자체로서 내 안에 있는 거야."
🔖 이런 식으로 굴을 먹는 것은 '실용'과는 거리가 멀다. 굴 맛이 주는 쾌락에 온 시간과 정성을 집중함으로써 생활인으로서의 기능은 멈추고 있으니까. 그래서 레빈은 오블론스키에게 이렇게 지적한다. "시골 사람들은 일을 하기 위해서 끼니를 빨리 때우려고 해.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오래 먹을 수 있나 궁리하는군. 그러려고 굴을 먹는 거고......" 맞는 말이다. 오블론스키가 굴을 먹는 장면이 유난히 방탕해 보이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굴이 값비싸서이기 때문도, 굴의 물컹한 식감과 껍데기를 입에 가져가는 자세가 에로틱한 연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도, 카사노바가 아침마다 굴을 강장제 삼아 오십 개씩 먹어서 정력을 보충했다는 유명한 일화 때문만도 아니라, 레빈에게 "그게 바로 인간 문명의 목적 아니겠어? 모든 것에서 즐거움을 취하는 것 말이야" 라고 받아치는 오블론스키의 쾌락주의적 가치관이 그의 식습관에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이 소설 주인공인 안나는 무언가를 먹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 안나느 비단 음식뿐 아니라 무엇에도 제 오빠인 오블론스키처럼 즐겁게 탐닉하지 않는 것 같다. (...) 오블론스키는 아내를 버릴 생각이 전혀 없고, 늘 가정으로 돌아와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즐겁게 수행한다. 사실 그런 역할을 지치지 않고 '즐겁게' 해내기 위해 끊임없이 외도를 하고 '인생의 낙'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사는 세상에 별 불만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안나는 자신의 남편과 가정을, 아니 남편이라는 존재와 가정이라는 세계 자체를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녀는 아내이자 어머니로서만 살아야 하는 인생이 아닌 무언가 다른 인생을 원한다. 브론스키에 대한 안나의 사랑은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인생의 낙'이 아닌, 자신만의 '인생'.
"난 아무것도 증명하고 싶지 않아. 다만 살고 싶을 뿐이야. 나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악한 짓을 하지 않으면서 살고 싶어. 난 그럴 권리가 있잖아. 그렇지 않아?"
🔖 이를테면 특정 동물들을 오로지 편리하게 잡아먹기 위한 목적으로 격리시키고, 우리 손에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게끔 길들여놓고, 대대적으로 번식시킨 다음 필요없는 개체들은 대대적으로 죽이고, 수지타산을 맞추기 위해 그들을 가혹한 환경에서 고통스럽게 살게 하다가 마침내 도륙하고, 전염병이 번지기라도 하면 한꺼번에 생매장하는 것. 우리가 지금 같은 편리한 식생활을 유지하려면 그런 잔인한 방법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우리가 지금과 같은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런 과정을 해당 직업군 사람들에게 맡겨놓고 나몰라라 해야 한다. 무지는 현대인의 삶에 필수이다. 우리는 식탁 위에 올라온 갈비, 삼겹살, 치킨을 먹으면서 그것들이 음식이 되기 전, 한 마리의 소, 돼지, 닭으로 살았을 생애를 알지 못하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 도시에서 우리는 고기를 먹으면서 우리는 삶과 죽음을 잊는다. 그리고 그 방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그 무지와 무관심과 망각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이 고기가 국내산인지 오스트레일리아산인지 미국산인지, 구제역이나 조류독감이나 광우병에 걸린 동물의 고기는 아닌지, 방사능에 오염되거나 유전자가 조작된 음식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고기를 사 먹을 때마다 공포를 사 먹는 셈이다. 자연이 우리와 우리 아이들을 위협할지 모른다는 공포 말이다.
물론 이누이트들도 자연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낄 것이다. 미약스도 그런 공포를 느낀다. 이를테면 그녀는 툰드라 한복판에서 길을 잃고 굴멍 죽거나 얼어 죽을 수도 있다. 회색 곰의 공격을 받아 절명할 수도 있다. 호수 얼음에 발을 잘못 디뎌 빠져 죽을 수도 있다. 그러면 미약스의 몸은 다른 툰드라 동물들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멧새, 오소리, 곰, 물고기, 여우, 늑대 등이 미약스의 고기를 먹을 것이고, 미약스는 그 동물들을 해치거나 죽이지 않고 푸짐한 영양분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약스가 먹은 순록 고기는 미약스를 해치거나 죽이지 않는다. 그 고기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는 너무나 자명하다. 그 동물들은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살던 어버이에게서 태어나 역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깨끗한 풀을 먹고 맑은 물을 마시고 청명한 북극의 대기를 호흡하며 지내다가 늑대들에게 쫓겨 죽었다는 것을 미약스는 잘 안다. 그렇기에 미약스는 자연이 그녀에게 내어준 이유식을 달게, 맛있게, 아무런 불안도 두려움도 없이 받아먹는다. 우리와 달리 그녀의 삶과 죽음은 그녀가 먹는 동물의 삶과 죽음과 단절되지 않고 긴밀히 맞닿아 있다. 미약스가 먹는 것은 바로 그런 삶과 죽음의 연속성이다. 미약스는 모든 생명체가 공평하게 살고 죽을 것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
🔖 또한 책 한 권과 따뜻한 음료를 가지고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낼 때의 행복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마틸다는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자기 방에 혼자 틀어박혀 책을 읽는 오후를 가장 좋아하는데, 그럴 때면 핫초콜릿과 코코아 믹스, 보브릴 한잔을 타서 옆에 두고 마시곤 한다. (...) 책장을 넘기고, 포크를 입에 가져가고, 입에 든 맛있는 것을 삼키는 동작을 반복하노라면, 그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세계 안에서 언제까지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 <마틸다>의 결말에서 부모를 떠나 새로운 삶을 꾸린 마틸다가 '독서 저녁식사'를 먹으면서 행복하게 살았겠거니 상상하면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다. 여자애가 책 따위 읽어 뭐 하냐는 말을 듣고 자란 여자들이 어른이 되어 좋아하는 책을 실컷 사 읽으며 맛있는 걸 먹는다고 생각하면 또 그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다. 지금 나는 좋아하는 일본식 오픈 키친 레스토랑에서 꽁치 알리오 올리오와 맥주를 즐기며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이 잔으로 수많은 '마틸다'의 작은 승리에 축배를 들겠다. 여러분도 나와 함께 건배하자. 우연찮게 우리가 지금 이 한 권의 책 앞에 모였으니 말이다.